맥주의 여행을 창조하는 엔지니어 기림 정택일 기술 팀장 인터뷰
맥주를 판매하는 입장에서 “이 집 맥주 맛있네” 만큼 듣기 반가운 소리가 또 있을까?
생맥주의 맛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는 맥주 제조, 유통, 보관 및 서빙도 있지만 드래프트 시스템, 즉 맥주를 케그(맥주가 들어있는 통)에서 뽑아 잔에 따라내는 설비를 디자인하고 설치하는 일도 포함된다. 그런 일을 하는 기림드래프트이큅먼트(Kirim Draft Equipment, 이하 기림)에서 기술 영역을 총괄하는 정택일 팀장을 만났다. 건축 일을 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공구나 연장과 친숙하게 지내온 그는 크면서 자연스레 손으로 무언가 만드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했다.
드래프트 시스템 설치란
2014년 설립된 기림은 맥주 제조를 제외한 모든 과정에 사용되는 설비를 다룬다. 시공 뿐 아니라 부품의 제작, 유통, 판매도 담당하며 새로 개업하는 펍의 창업 컨설팅도 한다. 정택일 팀장은 처음 사업의 일원으로 합류하고 나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왔다고 했다. “처음 6개월 동안 번역기를 돌려가며 해외 자료를 조사하고, 궁금한 건 모두 직접 실험해보고, 매일같이 회의를 거치며 지금의 체계를 하나씩 만들어갔죠.”
드래프트 시스템에 포함되는 부품들은 수도꼭지처럼 맥주를 따라내는 탭(Tap 또는 Faucet), 맥주가 담겨있는 케그(Keg)에 이산화탄소를 주입하여 맥주를 뽑아내는 커플러(Coupler), 이산화탄소의 압력을 조절해주는 레귤레이터(Regulator) 등 다양하다. 사용하는 부품의 30% 정도는 국내에서 자체 생산하며, 나머지 70%는 독일, 미국, 러시아, 벨기에 등지에서 수입한다.
“각 부품이 수입되는 회사가 다 달라요. 예전에는 그것들을 일일이 맞추어 하나의 형태로 조립하기 위해 많은 단계를 거쳐야 했는데, 지금은 체계가 잡혀서 필요한 단계가 확 줄었어요.”
진행 과정은 현장 미팅으로 시작한다. 매장을 직접 방문하여 우선 주어진 공간과 맥주의 개수를 파악한 뒤, 냉장고의 사양을 결정한다. 그에 맞게 자재 목록을 선정하고, 도면을 그리고, 자재를 발주한 뒤 제작 및 조립의 과정을 거친다. 이 모든 과정이 짧게는 1주에서 길게는 2주 정도 걸린다. “어떤 때는 그냥 전화해서 ‘해주세요’ 하면 바로 다음 날 되는 줄 아는 경우도 있어요. 파이프 하나를 설치하더라도, 필요한 경우 가공하고 용접하는 등의 작업을 거치는 데만 일주일 정도 걸려요.”
그는 지금의 시스템이 잡히기까지 2년은 걸린 것 같다며 그간의 고생을 회상했다.
드래프트 장비 설치가 맥주에 미치는 영향
정택일 팀장은 드래프트 시스템을 어떤 공간에 어떻게 설치하느냐에 따라 손님에게 제공되는 맥주 맛과 로스(Loss), 즉 맥주의 손실량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국내에서 주로 사용되는 드래프트 시스템은 크게 세 가지로, 비교적 작은 공간에서 운용할 수 있는 케그레이터(Kegerator) 형태와 가장 효율적인 냉장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워크인(Walk-in) 냉장고 형태가 있다. 마지막으로 맥주를 상온에 보관하면서 냉각기로 맥주를 급속 냉각시켜 서브하는 형태가 있는데, 이 방식은 산화의 문제도 있을 뿐더러 필터링이 안 돼서 쉽게 변질될 수 있는 크래프트 맥주에는 적합하지 않다.
또한 그는 맥주가 뜨거운 공기나 직사광선 등 외부 환경에 의해 변질되지 않도록 공간 구성을 신경써서 설계한다. 워크인 시스템의 경우, 손이 더 많이 가더라도 탄산가스를 냉장고 바깥으로 빼서 설치한다. 탄산가스는 낮은 온도일 때 높은 압력을 받으면 맥주에 더 빨리 녹아들어가는 성질이 있고, 그렇게 되면 과탄, 즉 양조자가 의도한 것보다 많은 양의 탄산이 맥주에 녹아드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이는 맥주를 따를 때 많은 거품을 유발해 로스를 높이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펍 운영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처럼 드래프트 시스템이 맥주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햐여 설치 이후를 더 신경쓴다. 단순히 결과물만 완성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펍 운영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일에 접근하는 것이다.
그는 특히 설치 이후 지속되어야 할 위생 관리가 많은 경우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설치할 때 뿐만 아니라 설치 이후 부지런한 세척과 그 방법이 맥주 맛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세척을 등한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세척 과정에서 어느 정도 발생할 수밖에 없는 로스 역시 운영자 입장에서 세척을 망설이게 되는 이유 중 하나다.
“하루이틀이면 괜찮은데, 장기적으로 흘려보내는 맥주를 돈으로 환산하면 예민해질 수밖에 없거든요.
가뜩이나 장사도 안 되는데 세척 때문에 맥주를 낭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세척을 꺼리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맥주가 잘 관리되어야 맛도 유지가 될텐데, 쉽지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그는 펍 운영자들이 되도록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편리하면서도 로스가 적은 위생 관리 방법을 고민하는 중이다. 최근 작업한 브루펍에서는 맥주의 당을 좋아하는 벌레의 유입을 방지할 목적으로 탭 입구에 마개를 달았다. 또한 워크인 냉장고의 경우 더 수월하게 청소할 수 있는 설비를 설치했다. 클리닝 케그(Cleaning Keg, 라인 세척용 청소통)를 사용할 필요 없이, 워크인 내부에서 외부에 바로 커플러를 연결해 라인을 세척하는 방식이다.
노력한만큼 결과가 나오는 정직한 직업
정택일 팀장은 자신이 하는 일이 ‘대충하면 안 좋은 결과가 나오고, 신경써서 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는’ 정직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대충 하면 분명히 얼마 못 가서 A/S가 발생하거든요. 자기가 작업한 현장은 자기가 제일 잘 아니까, 어차피 또 고치러 가야 해요. 이왕 하는 거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죠.”
그런 점에서 자신이 하는 일이 아주 매력적이고 추천해주고 싶은 직업이라고도 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을 만나고, 없는 걸 하나하나 만들다보면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 같아요.
완성된 모습을 보면 똑같은 경우가 하나도 없어요.”
편하게 일할 수도 있다. 이미 만들어진 제품으로만 구성해 간단하게 연결하면 훨씬 편해진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완성하는 것이 다가 아니며, 맥주 맛까지 생각하며 설계하고 시공하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솔직히 설치만 해주면 끝이긴 해요. 하지만 제가 설치한 매장 만큼은 관리가 잘 되어서 손님들이 맛있는 맥주를 마시러 계속 찾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