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래프트 맥주와 예술은 어느 지점에서 만날 수 있을까? 크래프트 맥주를 만드는 일은 그 자체로 예술이기도 하다. ‘Craft’라는 단어는 ‘기술’이라는 뜻에서 출발한 ‘Art’와도 일맥상통한다. 장인정신, 다양성, 마이너리티 감성, 실험성, 그리고 ‘관객’과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는 점은 크래프트 맥주와 다른 예술 장르의 재미난 만남을 상상해보게 한다.
유난히 날씨가 좋았던 6월, 여느 때처럼 철공소의 연마 소리가 한창인 서울 문래동 한 켠에서는 크래프트 맥주와 스트리트 아트(Street Art)의 협업이 진행되었다. 세계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프랑스 출신 작가 SP38이 문래동의 신생 브루어리를 위한 작업에 뛰어들었다. 한국에서 맥주 양조장으로 예술 작업을 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으로, 오픈을 한 달 앞둔 양조장 건물의 옥상에서 SP38은 섬세한 붓터치를 하고 있었다.
SP38은 베를린을 거점으로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활동하는 화가이자 스트리트 아티스트(Street Artist)이다.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으로 파리에서 오랫동안 활동했지만,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그래피티 문화의 본거지가 된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2004년 첫 번째 한국 방문 이후 이미 여러 차례 서울에 와서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한 바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서울을 비롯한 한국은 그에게 영감을 주는 곳이라고 한다. 유럽과는 아주 다르고, 또한 그가 아시아에 관해 알고 있던 것과도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스프레이를 사용하여 벽에 커다란 그림을 그리는 그래피티의 방식과 달리, SP38은 벽 위에 직접 무언가를 칠하기 보다는 주로 종이나 캔버스를 이용해 벽보나 포스터를 만들어서 붙이는 작업을 한다. 그가 만드는 벽보에는 대부분 슬로건이나 단어 등 메시지를 담은 활자가 독특한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초반에는 여러 단어로 이루어진 슬로건이나 문장 위주로 표현했어요. 하지만 메시지는 점점 더 간결해졌고, 최근에는 하나의 단어만을 표현하게 되었죠. 모두에게 해당되는, 모두를 위한 어떤 순간을 나타낸 단어가 대부분입니다. 나 자신에 관한 것이기도하고요.”
작품에 어떤 단어를 사용할지 결정할 때, 그는 단어의 의미와 시각적 구성을 모두 고려한다고 한다. 시각적 구성은 균일한 글자를 어떻게 배치하여 어떤 이미지로 디자인할 것인지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맥주 양조장으로 하는 예술 작업은 이번이 처음이다. SP38 역시 한 번도 맥주 양조장으로 작업을 해본 적은 없다고 한다. “양조장으로 작업을 한다는 발상이 재미있고 흥미로워요. 한국에서는 처음 있는 일로 알고 있는데, 그 점에서 아주 새로운 도전이기도 하죠.” 얼마 전 맥주를 끊었다는 그는 맥주를 마시지도 않으면서 양조장 작업을 한다는 게 한편으로 웃긴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는 처음 협업을 제안 받았을 때 다소 놀랐지만, '비어바나'라는 양조장 이름을 처음 듣자마자 바로 그 글자를 어떻게 쓸 것인지를 떠올렸다.
양조장 건물을 처음 방문했을 때 아주 아름답다는 인상을 받았고, 문래동 역시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특히 오래된 공장이 떠난 건물로 작업을 함으로써 그 건물에 두 번째 인생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레스토랑이나 유행을 따르는 옷가게가 아니라 ‘양조장’이라는 점 역시 새로운 아이디어를 불러일으켰죠.”
그는 문래동과 비어바나, 그리고 자신의 작업이 좋은 결합이라고 표현했다. 낡은 동네에 예술을 가져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면서도, 기존에 있던 것을 보존하는 성격을 띠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비어바나가 완성되고 몇 달 뒤, 이곳이 어떤 모습일지 기대가 돼요.”
SP38은 양조장 컨셉의 키워드 중 하나인 '평화'로 작업을 풀어가고 있다. 맥주를 만들고 나누는 과정으로 평화를 실현하고, 사람들이 맛있는 맥주를 마시며 다같이 평화에 이를 수 있기를 바라는 양조장의 염원이 담겨있다. ‘평화’는 베를린을 예술적 고향으로 삼은 그에게도 남다른 단어이다. “파리에서 베를린으로 옮겨올 당시 유럽에서는 '베를린 장벽'이 아주 중요했어요. 장벽이 무너지면서 동독과 서독이 다시 결합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의 상황과 비슷한 부분이 있죠. 파리에서의 생활에 지쳐 스트레스를 받고있던 제게 베를린은 이상향과도 같았고, 마음을 이끄는 곳이었어요. 일찍이 장벽 붕괴를 겪은 베를린은 대도시면서도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도시입니다. 이런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베를린에서는 폭력적인 현상이 많지 않으며 사람들이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편이지요.”
최근 한반도 외교의 평화적인 방향성에 관해 묻자, 그는 말했다. “얼마전 한국에서 남과 북의 두 정상이 만난 일은 정말 강렬하고 아름다웠어요. 또한 그것은 평화에 대한 염원과 소통의 의지를 보여주었지요. 군대를 멈추고, 전쟁을 중지하자는 메시지기도 했고요. 만약 두 한국이 통일하는 날이 오면, 그땐 서울로 거처를 옮기고 싶어요. 왜냐하면 그것이 제게 아주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평화에 대한 생각을 가져와
비어바나의 오픈 시기에 맞추어 SP38의 작품으로 전시회가 있을 예정이다. 그는 스트리트 아트가 기본적으로 반항적이고 복종하지 않으며 자유를 추구하는 성질을 띠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에서도 사람들이 수많은 벽과 버려진 공간을 활용하여 계속해서 떠들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유럽에서 어떤 사람들은 유명해지려고 스트리트 아트를 해요. 어리석은 짓이지요. 스트리트 아트나 그래피티는 시대를 담아낸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도시 곳곳에서 말을 걸고 질문을 던지는 SP38의 작품은 일상에 파묻혀 지내는 우리의 감각과 사고를 가볍게 건드려 깊이 있는 곳까지 유도한다. 크래프트 맥주 역시 ‘맛있는 제품’ 혹은 ‘좋은 맥주’를 넘어 ‘작품’이 되기 위해 그와 같은 과정을 거치는 게 아닐까? 무뎌진 감각을 일깨우고, 단단하게 굳은 마음을 녹이고,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를 불러일으키는 크래프트 맥주를 항상 기다리고 응원한다.